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털루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본군이 영국군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프로이센군의 통수를 맞아 패배하는 그동안 그루시는 와브르에서 프로이센의 유인부대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지만, '''[[뒷북|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섬멸도 섬멸이 아닌 것이 와브르에 있던 프로이센 병력은 17,000명 정도였고 대포숫자도 그루시가 40문 정도 많았고 병력은 이미 1만6천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피해는 둘 다 비슷비슷했고 프로이센군이 패배하고 이리 저리 도망치긴 했지만 전사자나 부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1만 6천의 병력이 더 많았다면 아예 완벽히 쓸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건 그루시가 역시 원수라는 직책을 수행하기엔 부족한 인물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 물론 워털루 전투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최소 그루시는 당시 휘하의 병력들을 안전하게 살려서 프랑스 영토 내로 무사 귀환시키기는 했다. 당연히 절망에 빠진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거니 생각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졌고 제국 의회나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의 훼방과 자기 자신의 의욕결여로 인해 포기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파리(프랑스)|파리]]로 귀환하지만 다시 싸워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 이후에 큰 전투가 한 번 더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다. 이시 전투로, 블뤼허가 웰링턴과 함께 파리로 진격해왔고 국방장관이었던 다부가 휴전협정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이 되기 위해 방담 휘하의 병력을 보내 블뤼허군과 전투를 벌인 것. 프랑스군이 공격을 펼쳤지만 블뤼허군이 이것을 막아냈고, 웰링턴과 연결이 이어진 후 프랑스가 휴전을 제의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다만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7월 2-3일)에 싸운 전투이다.] 다시 병력을 소집하고 정치적 반대를 억누르기에는 나폴레옹에게 그러한 권력이 남아있질 않았기 때문이다. 애당초 복위한 나폴레옹은 이전과는 달리 국민회의의 상설 설치를 허가하는 등 정치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폴레옹의 패보가 전해지면서 도끼눈을 뜨고 벼르던 라파예트 등 반대파들에게 여론의 힘이 쏠렸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승전만이 이런 사태를 무마할 수 있었고, 나폴레옹은 출정 전에 의회를 해산시켰어야 했다고 이를 갈았으나 결국 의회의 압력에 6월 22일, 퇴위를 발표한다.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 영국이나 미국으로의 망명을 희망했으나, 영국 정부는 그를 남대서양의 오지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보냈고, 나폴레옹은 거기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